고운소리(산행)

[스크랩] 북한산 의상봉에서 제암산까지

날밤새우 2010. 1. 2. 14:42

[3시30분 의상봉에서 북한산 정상을 바라보며]
어느날 문득 반복되던 일상을 접고 페이지를 훌쩍 넘긴 책처럼 
어딘가로 넘어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 실컷 자 봤으면...
단 하루만이라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가봤으면...
단 하루만이라도 누구의 간섭 없이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정말 단 하루만이라도 무중력 상태에 놓인 것처럼 
자유롭게 시간과 공간 속을 떠돌고 싶은 이 간절한 바람은 금요일이면 
어느 순간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마음을 온통 휘젖기 시작한다

[4시 의상능선의 용혈봉]
열병처럼 찾아드는 중증의 신열
이럴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나를 안아주는 산이 있다
그 속에서 젖을 수 있는 감동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나는 정말 선택된 행복자다
오늘도 예정된 산과의 만남을 생각하며 집을 나선다
제암산 산행 출발 시각이 밤 11시이기 때문에 모처럼 남은 시간을 이용
마음에 두었던 의상봉 산행을 위해 9703 버스에 몸을 실었다
구파발 지하철역에서 34번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서 하차하여 산을 올려다 본다
연두빛의 짙은 색채로 물들어 가는 원효봉이 바위와 어울려 
멋진 풍경을 연출하며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매표소를 들어서자 마자 좌측 개울의 맑은 물에도
봄은 생명을 실어 나르며 부지런히 제할 일을 하기에 분주하다
의상봉을 오르는 산자락에도 벚꽃과 진달래가 군데군데 화등을 밝히고 
한적한 길섶의 나무에도 나뭇잎들이 제법 파릇하게 솟아오른다

[5시 의상능선의 기기묘묘한 바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상봉에 올라 바위에 기대 앉아 기쁨을 누리고 있으니 
내 속을 아는 듯이 바람이 스쳐주고 꽃과 나무들 또한 동감을 말하듯이 끄덕여준다
자연의 의지에 사람의 마음이 충만되는 이 시공간이 얼마나 그윽한지 
살랑거리던 진달래 꽃잎들이 범람하지 않는 희열로 출렁인다
하늘을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함께 있어 행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용출봉을 거쳐 유유자적한 산행길은 
구기터널 매표소에서 6시간의 아쉬움으로 끝난다
땀으로 얼룩진 셔스와 거울을 보니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구기터널 입구의 사우나에 들려 오늘 하루를 수고해 준 내 육체를 정성껏 씻어준다

[5시15분 차밭을 향하는 미로의 터널]
저녁까지 먹었는데도 시간이 남아 PC 방에 들려 카메라에 담은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북한산 산행으로 피곤한 탓인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 속으로 빠져든다
눈을 떠보니 보성 다원 녹차밭 근처의 주차장이다
미로 같은 짙은 안개와 삼나무 숲이 어울린 길을 걸어 녹차밭으로 향한다
주변의 숲이 가득한 안개의 사술에 묶이면서
마법의 장막 속으로 들은 신비한 세상이다
조용히 밀리는 안개의 요요하고도 부드러움에 슬그머니 말려드니
녹차밭은 참으로 오묘한 침묵 속에서 움직인다
숲을 메운 안개가 느릿하게 흘러오다가 녹차밭을 스멀스멀 휘감으며
더러는 눈썹에 맺혀 이슬을 달아준다

[6시 마법의 사술이 걸린 차나무밭에서]
숲은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내고 보이지는 않지만 무수한 입자들이 가득히 움직인다
알 수 없이 움직이는 신비한 입자들의 느린 행렬에 싸여
흐르는 무리들을 안아보면 살며시 새어버린다
다시 양팔 가득히 채워서 끌어보면 또 새어버리는...
이렇게 숲이 안개 속에 있을 때면 숱한 영과 기운들이 안개를 타고 와 
고요히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부드럽게 깨어나게 한다
현실에는 없는 오직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무진의 풍경처럼
손에 잡힐듯 하면서도 다가서면 사라지는...
그렇지만 더 가깝게 느껴진다
자욱한 안개에 덮혀 있던 내가 태어난 시골과 너무 닮은 탓일까?
시간 때문에 떠나면서 뒤돌아 보는 풍경이 아쉽다
제암산 산행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다시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7시18분 산행초입인 감나무재]
주차장에서 20여분을 달려 버스는 제암산 산행초입인 감나무재에 도착한다
널찍한 등산로 좌우측에는 기대했던 철쭉꽃 대신에 
푸른나무들과 간간이 눈에 띄는 활짝 핀 진달래꽃이 마른 감성을 푸근하게 안아준다

[7시40분 작은산쉼터]
인위적으로 심은 연상홍들이 화려한 물결을 이루는 가파른 길을 올라
요란한 라이온스클럽의 상징물과 쉼터가 있는 작은산에 도착한다
눈을 돌리니 사자산 제암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유유히 흘러가고 
아래쪽으로는 들녘과 마을이 평화로운 풍경이다
남쪽으로 보인다던 득량만의 짙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고
산자락에는 연초록의 나무들과 이따금 보이는 벚꽃들이 무박산행의 피곤함을 씻어 준다

[굳게 닫은 잎술]
기대했던 철쭉은 이제 꽃망울을 다지고 있어 실망이 크지만
거침없이 펼쳐지는 조망은 문득 거대한 공명을 불러 일으키는 풍경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너무 조용하고 포근해서 어찌 다른 세상으로 나온 기분이다
부르듯이 우혹하는 아련하게 달려가는 능선
세속의 눈으로 보면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 같지만
반가운 친구처럼 좋아하다 보면 산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사소한 것 하나도 
얼마나 감정을 맑게 해주는지 모른다

[8시15분 생명이 움돋는 활기찬 들녘]
느긋하게 길을 가다가 편안한 곳에 서서 산을 담아 본다
산이 풍겨내는 체취, 마치 흐르는 물 속의 기포처럼 바람에 불어오는 나무와 꽃들
그 내음들을 살며시 향유하고 있으면 산이 감추고 있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저 들어가는 산이 아니라 바람이 멈추는 물에
산 그림자 비치듯이 마음에 산을 투영시키며 그 분위기를 익힌다

[정상의 임금바위로 이어지는 아련한 능선]
오를수록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서서히 보인다
밝은 연두빛들이 봄을 타고 흘러오는 흔들림 속에서 정상의 암릉은 
넘지 못할 큰 힘을 느끼게 한다 
정상의 암릉에 올라서니 화사한 봄은 출렁이는 물결처럼 사자봉 쪽으로 이어진다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은 나에게도 색칠을 해댄다
바위 곁에서 가지를 내밀고 얄랑거리는 잎들은 몸을 추스리면서도 
그 움직이는 빛살의 퍼들퍼들한 모습은 
자연이 표현하는 판토마임처럼 오묘한 형용사다

[9시50분 억새군락지의 통신탑]
암릉에서 내려와 억새들이 흔들리는 능선길을 쉬엄쉬엄 걸어간다 
새들의 노래소리까지 있다 보니 늦가을의 분위기다

[10시10분 형제바위]
하산길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바위가 오래도록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냥 보면 삭막한 바위지만 천천히 둘러보면 작은 꽃들의 밝은 모습과 
저렇게 고된 결점을 극복하여 깨닫게 해주는 장한 소나무까지 있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운치를 그려낸다
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운 같아서 
더도 덜도 말고 나무와 풀꽃처럼 노력하자는 마음이 열기 가득한 햇볕에서 
햇볕보다 더 뜨겁게 나를 태운다

[10시50분 곰재 갈림길]
곰재에 도착하니 한낮의 햇볕은 초여름을 연상시킨다
여기저기 그늘 좋은 나무 밑에는 등산객들이 몰려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우리 역시 조금 전에 쉬었지만 훤한 그늘의 아늑한 인정을 만나니 
흐르던 물이 맴돌듯이 여기에서 주저앉는다
앞쪽의 사자봉을 향하는 산길엔 등산객들이 무수하지만
그늘에서 맞이하는 여린 풀바람은 너무 시원하여 더이상의 산행을 가로막는다
머리 위에서는 사각거리는 연두빛 잎들의 낮은 소리가 은근하다
새삼 푸근한 산의 인정에 감복되고 분위기 탓인지 허기를 느낀다
새벽나무님을 비롯하여 생기님 그리고 금파님과 동행한 듬직한 꿈나무님
남은 음식을 모두 풀어 놓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같이 나누고 어울릴 수 있다는 것
다른 연인들 사랑한다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은 것은 고요한 숲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마음이 맑아져 내 모습이 초라하지 않아 혼자 일지언정 
자연과 벗하면 매일 푸른 날이다
사랑이 있을 법한 숲 속, 향긋한 여인이 되어 나무들이 나를 잡아당긴다
여기에서 몇 시간을 보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쓰레기를 정리하고 배낭까지 메고 일어선 김에 사자산 산행은 포기한 채
신기마을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스스로 움직이는 나무들과 꽃들은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 같아 반갑고 고맙기 이를데 없다
즐겁게 어울리다가 때가 되어 떠날 때 고마운 전송을 받으며 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생명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결산이며 
마음 깊이 남는 인연의 자취이기에 가다가 손 흔들어도 그 정이 떠나지 않는다

[12시40분 오늘 하루를 수고해준 발에게]
신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육산의 푸근한 산길이다
뒤 돌아 보면 산줄기가 봉우리를 세우고 흐르면서 형성된 
능선과 골들의 모양세
골짜기는 여유가 아늑하고 물소리 때문인지 푸근한 기운이 피어 오른다
저멀리 아래쪽에 보이는 금산저수지와 산자락은 군데군데 붉은 기운이 넘쳐나
다양한 제암산의 모습은 마치 여러 사람들이 일을 하며 나타내는 
제각각의 스타일 같다
하여 느끼고 구분하는 산행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산이 품고 있는 모습이 성격이나 활동처럼 느껴지고 보인다
개울가에서 산의 생명수에 발을 담근다

[1시 산행 날머리를 나서며]
편안히 앉아 느리고 깊은 숨으로 산의 고요를 익히고 감성을 풀면서
산행 날머리를 나서니 마음은 능선과 봉우리 따라 흘러간다
문득 넓은 곳에 닿아 물 위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편해지면서
물의 파동 같은 느낌이 잔잔히 번져온다
오늘의 산행을 마치는 순간이다
덧:산행을 같이하신 여러님들 즐거웠습니다
출처 : 햇빛산악회(독신,싱글산악회/여행)
글쓴이 : 마나술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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